대충 멀쩡

by 공기 posted May 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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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 속 정지 화면처럼 삶이 멈추어 버렸다.


또다시 늪에 빠진 것처럼 허기가 아닌 허기가 지고 달달한 것이 땡기기 시작했다.

아이고 또 왔구나 이제는 안오면 서운한 무기력.  삶에서 능동성 세글자만을 지우는 아주 편리하고 선택적인 무기력 되시겠다.


대체 이유가 무얼까? 이유를 생각하기 이전에 그냥 닥치고 운동을 하면 해결이 될까? 근데 걍 아무 것도 땡기지가 않네. 취미도 운동도 그림도...나는 도대체가 맨날 모든 게 다 조루야!



발단은 역시 어린 시절의 기억.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까지도 집 밖에만 나가면 거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머릿 속에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아도 입밖으로는 꺼내지 못했고 바보같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단 한마디도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네" 또는 "응" 또는 단답형으로 대답할 뿐.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롤링 페이퍼를 받으면 99퍼센트 '공기야 가만있지좀 말고 말 좀 해'라는 내용 뿐.


내가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나는 타고난 기질적 특성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인터뷰 과제가 시작되었다.


아 엄마도 어렸을 때 나랑 비슷했구나. 낯을 가렸구나. 일이 좌절되었구나. 그래 엄마도 힘들었겠구나. 

근데 엄마는 대물림이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두분 다 엄마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주셨다. 그게 부담이었을까?

(번외편 외할머니 인터뷰 : 엄마한테 화 낸적 없음 모든 것을 허용해줌 할아버지는 동네방네 자랑하며 이뻐함)

엄마는 잘 몰랐고 최선을 다했고 내가 죄인이지 이제 기승전 엄마 탓 좀 그만해.  (20살 이후로 기승전 엄마탓함 징하다;)


어쨌든 이해해야 할 것 같으니 응 알았어. 미안해. (의문 해결 안됨)



달밤을 시작하면서 등산이 재미가 있어졌다.

엄마 아빠를 끌고 등산을 갔다. 엄마에게 할 일이 생겨 아빠와 단독으로 등산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아빠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아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너무나 고생이 심했구나. 그건 진짜 리스펙트 인정.

아빠 또한 내리사랑을 받아본 역사가 없었구나. 그 시절엔 공부조차 죄였구나.

그래 나도 지금은 관심이 없었던 걸 후회한다. 그래서 지금 노력하고 있잖니.

근데 결국 가족들한테 관심없었던 건 엄마 탓을 하는구나. 내가 먼저 애교부리며 안기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엄마가 이야기 안 해주면 직접 물어봤음 될 것을.


어쨌든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네 알았어요. 참 힘드셨겠어요. (역시 미해결)




나이 이정도 먹었으면 진짜 부모님을 다 이해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이제는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독립하고 나서 광명찾고 한동안 사이가 너무 좋아진 것 같았는데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힘이 빠졌다.



부모님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너와 동생이 이렇게 크게 모난 데 없이 자랐으니 다행이다.




아아니 착각도 유분수지. 이게 무슨 멍멍이소리인지?

아 혹시 나만의 착각인가? 나만 피해망상에 빠져 산 건가? 또 확인 들어가본다.




마지막으로 남동생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브리님의 남동생 대화 글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당! 남동생과 최초의 인터뷰!)


누나 나는 아빠한테는 화도 안나고 사랑도 없는 그래서 뭐 약간 남같은 느낌인거고

영화에서 아빠얘기 나오면 더 울어 아빠없이 자란 애처럼

엄마얘기 나오면 공감 안하고 싶어서 거부감 들어 엄마한테는 감정이 많아서 나한테는 거부감 그 자체야.

엄마는 주적이지 나한테는 주적인 엄마와, 남같은 아빠 밑에서 자란거라

집(가족)에서 얻지 못한 유대관계를 친구나 교회에서 얻었으니 그냥 '포기' 했다고 보는게 맞을듯
애초에 정신적 육체적 안정과 회복을 할 수 있는 '집'이 나한테는 없었으니까


나는 어차피 완전한 이해는 할 수 없는거 같고 그냥 나이 들어서 점점 힘들어하는 아빠나 엄마 보면 안타까운 느낌
그냥 나한테 잘못한건 됬고 두분이 좀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넘어간드



아 그랬구나. 시발 나랑 존똑으로 상처받았네.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이 있네.

내가 틀린 게 아니었구나.



이해가 아니라 포기가 답이라고.

아 그래 아무리 정답을 쪽집게로 들어도 내가 진짜로 겪어서 깨닫지 않으면 소용이 없네.



아니 그래도 틀린 것 같아. 내가 잘못 된 것 같다. 우리 집은 막 대놓고 학대를 한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게 부족했던 것도 아니야.

한때는 내가 앞장서서 남동생을 뭐라했었다. 받은 것도 많은 편인데 왜 그리 못잡아먹어 안달이냐고.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교양있고 말짱한 부모님.  그러나 그 고운 말 속에는 철저하게 공감은 없는. 매우 차가운.



그치만 이런 문제를 털어 놓았을 때 내 주변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노 공감 예스 비난이었다.


야 너가 아직 나처럼 진정한 시련을 못겪어봐서 그래... 하나님을...(이하생략)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부모님인데 다 너를 위해서 그러셨겠지.

와 철 좀 들어야겠다. 세상 밖으로 나와. 온실 속 화초같아.


등등등. 


이런 이야기를 해준 이들 전부 나보다 훨씬 심하게 감정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힘들었을 사람들이었기에.



무엇보다 특히 엄마가 늘 이야기했다. 항상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근데 너는 왜그러냐고. 



내 아픔에 상처에 진심으로 공감해주었던 사람이 전무했던것은 아니었다. 단 두 명에 불과했지만 있었고 그들은 오직 나와 똑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기에 공감 해주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그 두 명을 매우 크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텐데 나는 왜 무시하고 말았던 걸까?


그 둘 다 겉보기에 말짱해보이지 않았다. 솔직하게 본인들의 상처를 인정했다. 나는 말짱하지가 않은데 나랑 너무 비슷해서...


그래서 나보다 힘들었으나 겉으로 보기에 아조 말짱해 보이는 이들의 (거짓)말을 믿기로 했다.



그들은 진짜로 멀쩡했던 걸까?

멀쩡하지도 않은데 멀쩡 한 척 하는것은 아니고?

그들은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며 만족을 하고 있을까?



(밤비쌤 인도하사)


헐........당연하게도 대답은 그렇지 않다 였다.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진짜로 멀쩡한 것이 아니라 멀쩡한 척 하는 것 뿐이라는 걸...


와우 유레카!


이걸 어린이날 이 새벽시간에 깨닫고서는 이렇게 또 암초 뿌리 하나를 캐내고 있다.

막혀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시원한 기분이다. 



사실 해적선에 와서도 또 광명찾고 나와 비슷한 상처들에 최선을 다해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었던 반면,

다른이들에게는 얼마든지 이해와 공감을 해주면서 또다시 나의 상처는 너무 별것 아니라며 여전히 비교를 하기도 하고 완전 오락가락하던 중이었다.



내 안에 멀쩡한 척 하는 '나 들'이 기생충처럼 숨어있었던 거다.


나한테는 대충 멀쩡한 척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오히려 멀쩡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게 필요한 거였어. 돌고 돌아 결국 같은 결론.



하지만 멀쩡한 가족들이여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영원히 또 만나지 맙시다!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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