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4 20:56

놓친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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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광기술 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과 동기 교육생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서 또 답을 찾아내면서 그 동안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또 깨우치게 되며 ‘질문’의 중요성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거쳐오면서 문득 내가 꼭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질문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중학생 때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가 나름 유명한 요리연구가였다. 그걸 알고 와 신기하다 생각하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그 친구가 싸온 도시락을 보고 기절초풍한 적이 있었다. 그 애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옥수수 통조림 캔과 플라스틱 숟가락 하나였다.


“헐 야 이게 뭐야?”


“응 도시락이야. 점심밥.”


그러고 태평하게 옥수수캔을 똑 따서 그걸 퍼먹기 시작하는 친구가 생각났다. 씨발 엄마가 요리연구가인데 딸한테 옥수수캔을 싸주다니. 그때는 와 그냥 어이가 없다 니네 엄마 웃기다 이러고 넘어갔지만 그건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애가 매번 옥수수캔을 싸 온건 아니긴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이었다. 가끔은 핑크색 플라스틱 통(보온이 안 되는)에 오이지무침에 밥만 싸올 때도 있었다. 그 오이지무침이 대존맛이라 밥도둑이긴 했지만 딸 도시락에 오이지무침만 싸주는 엄마라니.

그때 난 걔를 데리고 던킨에 가서 핫초코 시켜놓고 인터뷰를 했어야 했다.


너네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


너는 왜 오이지무침만 싸와?


혹시 오이지무침만 있어도 밥을 잘 먹니? 아니면 오이지무침 없으면 밥을 못 먹어?


내 친구가 오이지무침이 아니면 밥을 못 먹는 입맛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꼭 물어봤어야 했다.




또다른 친구는 엄마가 무척 차가웠던 기억이 난다. 가끔 만화책 빌려서 집에 놀러 가면 공간은 넓고 아주 깨끗이 정돈되어 있어도 뭔가 싸한 냉기가 집안에 흐르던 게 생각난다.


아무튼 그 애가 어딘가로 이사를 가기 전 친구들에게 밥을 사준다며 동네 중국집에 서너 명 정도를 불러모았던 추운 겨울의 일이다. 우리들은 와~~ 신난다 짜장면이다 하면서 몰려 갔다.


그리고 그 중국집의 작은 방에서 걔네 엄마가 나왔는데 우리를 스윽 훑어보더니 본인 딸한테 “얘, 너만 들어와라.” 하고 차갑게 뒤돌아서 들어가버렸다. 모인 친구들은 너무나 무안해서 벙쪄 있고 우리를 부른 친구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너무 서럽게 우는 그 애를 달래서 들여보내고 나머지들은 방황하다가 배고파서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왜 걔네 엄마는 딸의 친구들한테 짜장면을 안 사줬을까?


우리가 못생겨서 그랬나?


아무튼 물어봤어야 했다. 똑같이 던킨 데려가서 핫초코 시키고 너네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 라고.


아니면 들어가는 그 아줌마 팔을 붙잡고 도대체 왜 그러는거에요? 우리가 뭘 잘못했어요? 라고 물어봤어야 했다.



성인이 돼서 만난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수녀가 되었다.

하느님이 내 친구까지 뺏어가는구나.

믿기 힘든 일이었다. 네가 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서 왜? 라고 물어봤다.


친구의 대답은 “수녀원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도중 부르심을 들었다.” 였다. 그래서 나는 “그 부르심이 뭔데?” 라고 물었지만 그 친구가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았다.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면서 넘어가버렸다.

부르심… 그래 알겠어 라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꼬치꼬치 캐물었어야 했다. 나중에 그 친구가 홈페이지에 게시한 글을 보고 그 부르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애가 수녀원에 들어간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 애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 할까봐 ‘두려웠다’ 라고 글에 썼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사랑 혹은 기쁨 아니면 소명의 발견 이라고 생각하고 그 친구가 입회하는 날에도 응원 차 내려갔는데 두려움이라니. 두려움이라니!!!!!


그래서 넌 도대체 뭐가 두려웠는데? 라고 기억을 더듬으니 교수였던 그 친구의 아빠가 생각이 났다. 그 친구는 입회를 말리던 아버지와 절연을 하고 수녀가 되었는데 문득 혹시 이건 하느님의 힘을 빌어 아빠에게 엿 먹이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복수. 절연.


이 짐작이 맞을 지 혹은 내 개소리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말한 그 부르심의 근거가 뭔지 물고 늘어졌어야 했다. 우리가 자주 가던 파이집에서 그 얘기를 했을 때 파이를 집어 던지고 걔 멱살을 잡고 물어봤어야 했다. 그 애가 상세한 답을 회피했을 때, 수녀원에 들어가는 이유가 혹시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면 도대체 무엇이 두려웠는지 다른 원인이 있지 않은 지 물어봤어야 했다.




나의 구남친은 늘 집에 가면 플라스틱 암웨이 물통에 뜨거운 물이나 펄펄 끓는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리고 부엌에 있는 각종 집기가 온통 플라스틱이었다. 그걸 보고 너무 놀라서 스타벅스 머그컵 세트를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는 왜 플라스틱 암웨이 물통만 써? 그렇게 마시면 몸에 안 좋지 않을까?”


“응 이게 그냥 습관이 돼서 편해. 다른 건 불편하더라고.”



도대체 왜!!! 암웨이 물통에 김이 펄펄 나는 음료를 담아 마시는 지 더 물어봤어야 했다.

그냥 아 이 사람은 이상해, 별로야 나랑 안 맞아, 환경호르몬도 모르나? 말고 좀 더 관심을 기울여서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이렇게 묻지 않은 질문들이 많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계속 떠오를 것 같다.

내가 묻지 못한 질문들이. 내가 관심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아서 혹은 주의 깊게 보지 못해서 혹은 그저 삼켜야만 했던 질문이.




아아.

질문.

놓친 질문들이 너무 많다.

  • profile
    공기 2021.05.16 02:22
    아이고 에피소드 하나하나 다 주옥같아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모르겠어도 딱히 질문은 하지말라고 왜냐고 묻지말라고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왔잖아요. 지금 이순간에라도 이렇게 질문들이 떠올라서 참 다행이다 싶어요.


    브리님이나 저도 누군가에게 놓친 질문이었던 적이 있겠죠?

    지금은 야광 배를 타고 질문의 바다를 헤쳐나가고 있지만요 ㅎㅎㅎ


    브리님이 오랜 세월 삼켜버렸던 목 막히는 질문들이 인제는 꽉 막혀있던 명치에서 이렇게 글로 또 오르로 근육으로 술술술 풀려나오고 있는거 같아요.
  • profile
    브리 2021.05.16 10:12
    to : 공기
    정말 질문과 무언의 압박이 계속 쌓여 있었나봐요ㅠ
     
    계속 풀어나가는 동시에 앞으로는 덜 쌓이도록 표현도 많이 하고 참지 말아야겠어요!



    공기님은 친구들에게 하지 못한 질문이 있으세요?

  • profile
    공기 2021.05.16 22:26
    to : 브리

    요새는 주변인들에게 인터뷰를 곧잘 하곤합니다.


    너 괜찮아? 그게 니가 정말 원하는거야?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어?


    요령없이 꼬치꼬치 캐물어서 그런가 좀 귀찮아하는거 같기도 하고요;



    못했던 질문이라면 예전 소꿉친구에게 너 괜찮으냐고 너희 엄마 왜저러시냐고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생각나요. 


    그 아이 엄마는 대학교 오티날까지 쫓아가서 학생들에게 우리 딸이랑 잘 지내달라고 하는 분이셨어요; 우리강아지 하며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시는 한편 원하는 만큼 학교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안색이 쌱 바뀌시는 분이었어요. 


    예전 글에도 언급한 적 있었던 그 친구는 결국 조현병이 왔고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아요. 



    지금은 동생에게 하지못했던 질문들이 생각나네요. 생각난 김에 조금씩 해봐야겠어요.ㅎㅎ

  • profile
    브리 2021.05.17 00:58
    to : 공기

    질문도 운동처럼 클리 자위처럼 자주 꾸준히 해 보는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렇게 하다보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더 상대에게 이입하고 깊은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게 되면... 자신과의 대화가 원활해지면서  좀 더 자연스럽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제대로 던지고 제대로 답해보고 싶어요.


일상 이야기

읽기 : '한국인' / 쓰기 :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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