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6 01:06

아빠와 보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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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은 식사 자리에서 대화를 나눠본적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가족끼리 마주 앉아했던 기억나는 대화가 단 하나도 없다!

 

개그콘서트에 나왔던 대화가 필요해 코너의 가족은 그래도 말이라도 했지

우린 그런 것도 없었다.

엄마는 밥 차려주고 끝. 맛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없고

다른 이가 어떤 메뉴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알려고하지 않았다.

 

아빠는 밥먹고 끝. 나도 동생도 밥먹고 끝. 다 먹은 그릇만 싱크대에 갖다 놨었다.

동생은 그래도 20살이 넘어가면서 엄마를 도와줬던 것 같은데

나는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나서지 않았다.

 

대학생 때까지도 집에서 밥을 먹을 때 설거지를 하거나 상차림을 도와주거나 하지 않았다.

반면 학교에서 MT를 가거나하면 눈치껏 할 수 있는 일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인격이 두 개였었다.

밖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고 떠드는 내가 있었고

집에만 가면 말이 없고 웃지 않고 표정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가면서 일찍 독립을 했던거고.

 

 

 

대학에 가기 전에 엄마 아빠에게 딜을 제안했던 적이 있다.

대학 등록금을 어쩔 수 없이 부모님 손을 벌려야했는데

그냥 벌리기는 미안해서 제안을 했다.

말이 안되지만 내 입장에서는 제안조차 엄청난 양보였다.

 

그 제안인 즉슨 아빠는 담배를 끊을 것, 그리고 집에서 땅콩 껍질 같은 부스러기를 흘리고 방치하지 않을 것,

그리고 소변 볼 때 변기 뚜껑을 올릴 것을 요구했다.

엄마에게는 집을 깔끔하게 유지해주길 요구했다.

나는 집에 살 때 발에 부스러기들이 밟히는게 너무 싫었다.

 

부부 싸움하다가 아빠가 던진 각종 화장품 병이 바닥에 깨져 놔뒹구는 것 같아 더 싫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부지런함을 요구한게 나는 '아빠 엄마의 삶을 한번 돌아봐'라는 의미였다.

다른 의미로는 내게 관심을 좀 가져달라는 거였고.

 

집에서 살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제안을 한게 참 재밌다. 이제와서 보니.

그리고 내가 엄마 아빠에게 해준다고 한 건 교회에 가는 것이었다.

20년 동안 억지로 다닌 교회에서 해방 될 기회가 생겼는데

다시 내 발로 기어들어가겠다는 제안이었고

 

나는 당연히 엄마 아빠가 받아들이고 노력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아빠는 소변 같은 얘기를 대놓고 한다고 신경질을 냈고

엄마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오히려 마음 편하게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에게 등록금과 생활비를 받으면서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했다.

 

학교와 종친회에서 장학금 받는게 시간 대비 효율 최고였고,

방학 때 알바를 하기도 하고,

기숙사비를 아끼려고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여러번이었다.

생동성 실험에도 참가해봤다 ㅎㅎ 약 먹고 어지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부모님과의 대화는 거의 단절되었다.

한번 학교에 가족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잠깐 얼굴만 보고 들어갔다.

아마 말도 한마디도 안했을거다. 인사조차 하지 않았었다.

아빠도 한숨만 쉬고 대체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성경책만 주고 갔다.

 

약 10년 정도를 그렇게 살았다.

대화는 최소한으로. 나는 알아서 잘 살고. 엄마 아빠는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엄마 아빠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보니까 엄마 아빠가 많이 늙어있었다.

 

그러다가 야광기술을 듣고,

모든 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부모님과의 관계를 잘 정리하는게 중요하다는

선장님의 말을 듣고 부모님에게 메일로 내 마음을 전했었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싸운게 무서웠다고.

 

그 때 나도 회사를 다니고 과장 부장들을 만났는데

부모님 얘기를 할 때 민망했었다.

부모님 용돈은 드리냐, 집에는 얼마나 자주가냐

그러는데 나는 그런게 없었기 때문에

뭐라 얘기를 해야할지 민망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랑 사이 안좋다고 대놓고 얘기하기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편지 쓰기 과제를 해야겠다 맘 먹었다.

 

 

 

 

원래 보드게임 얘기를 할려고 글을 적기 시작했는데

보드게임 얘기를 할려고 그런게 아니었는지

보드게임 얘기는 비중이 작아질 것 같다.

 

내가 고등학생 때 보드게임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인생 첫 보드게임을 샀었다.

친구들과 몇판 해보구 그랬는데, 그 때 나는 가족들과 당연히 대화를 하나도 하고 있지 않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아빠에게 보드게임을 같이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기억은 안나는데 거절을 당했나보다. 아마 부끄러워서 그랬을 거다.

10년 뒤에 아빠가 장문의 답장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 그걸 거절한게 나름의 한이 맺혔었나보다.

아마도 나랑 친해질 마지막 기회처럼 생각하고 10년 동안 그걸 신경쓰며 살았나보다.

 

그리고 10년 뒤에, 지난 연말에 가족들과 여행을 갔을 때

네 가족이 한 테이블에 모여 처음으로 보드게임을 했다.

그 전에 엄마랑은 한적이 있는데 아빠가 낀 건 처음이다.

이제서야 민망함이 좀 수그러들었나보다.

 

그래놓고 본인이 제일 재밌어한다.

아빠는 본인이 남들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의 생각을 잘 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피곤하단다. 모르면 편한 것을 자꾸 보이니까 신경쓰게 되고

지적을하거나 얘기를해서 문제를 만든다고 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보다 직관이 뛰어나다고 한다.

나는 직관이 뛰어날 순 있어도 그걸 항상 옳다고 믿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빠는 또 굉장히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이번에 했던 보드게임이 직관이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예상한 카드를 맞추는 게임이었는데

아빠가 그게 잘 되서 가장 점수가 높았다.

또 엄마랑 잘 맞는 부분도 있었고.

 

그래서 1등을 하니까 아빠가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신이 나 보였다.

그렇게 재밌어 할 거면서 왜 옛날에는 거절을 했는지

굳이 따지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안 들었다.

 

신나하는 모습이 애기 같기도하고

보기에 좋았다.

또 굉장히 신중하고 진지하게 플레이하는 모습도 보였다.

 

예전엔 그냥 신경질만 내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속으로 몹시 많은 생각을하고 고민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요즘에는 자기 얘기를 털어 놓기를 즐겨하고

울기도 잘 울고, 못난 모습을 인정할 때도 있어서

아빠라는 캐릭터가 재밌어졌다.

 

그래도 고집이 쎌 때는 세상 끝까지 놓아주질 않는다.

  • profile
    모솔인척 2021.01.26 01:25
    우리아빠도 되게 무뚝뚝하고 답답하고 그랬는데...
    아빠라는 존재를 별개의 한 남자로 바라보니깐
    참 짠 한 것들이 많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어린아이가 되는 아빠
    어린이가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나.

    그 갭이 점점 줄어 들어서 가까워지게
    되는 것 같기도 ㅎㅐ요.


    탐생님의
    적극적 어른되기를 응원합니다~^^
  • profile
    탐구생활 2021.01.26 09:11
    to : 모솔인척
    그러네요. 아빠를 내 아빠에서 벗어난
    나와 같은 인생 1회차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
    사람 대 사람으로 공감이 가기 시작했어요.
    나름 어려운 일이 많았구나~하면서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면
    어릴 때 부터 차라리 그런 걸 좀 나눠주면 좋을텐데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힘든 얘기를 하면 안된다는
    관념이 있어요.

    짐을 짊어지라는 것만 아니면
    부모의 고민을 아아에게 조금씩 알려준다면
    공감하는 경험도 해보구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지속적인 응원 고마워요 모솔님~!
  • ?
    되어지다 2021.01.26 08:14
    가족끼리 대화가 없는게
    참 닮은 거 같아요
    다만 저희집은 저랑 엄마가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무슨말을 꺼내야 하는지 몰라서 동생이 얘기 할때까지 기다리네여 ㅜ

    가족과의 관계는 참 마음의 짐이기도 하고 제 뜻대로 안되는 부분이라 풀리지않는 고민거리인거 같아요

    특히나 고집이 쎈 우리집 같은 경우에는 말이 안통하니 계속 대화를 안 하게 되는 반복 패턴이 ㅠㅜㅜ
  • profile
    탐구생활 2021.01.26 09:15
    to : 되어지다
    다들 고집이 쎄면 진짜 어렵죠.
    저도 그렇고 동생이 고마운 역할을 도맡아하는
    경우가 또 있네요 ㅎㅎ

    어머니랑 되어지다님은 대화를 원하는 편인데
    민망스러워서 말을 못 꺼내시나봐요.

    그럼 동생이랑 둘이 먼저 편하게 얘기해보시면 어떨까요??
    제가 동생이랑 먼저 친해면서 가족 안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거든요.
  • ?
    희희 2021.01.26 14:47
    오랫동안 하나의 캐릭터로 보였던 부모님에게
    다른 캐릭터가 보이면 너무 재밌고 신나지 않아요?
    낯선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탐생님 아버지도 혹시 처음 겪는 경험은 아니실까요?
    그렇다면 탐생님에게 무척 고마워하실듯:)
  • profile
    탐구생활 2021.01.26 15:58
    to : 희희
    흥미로웠어요 ㅎㅎ 아빠 엄마의 뒷 얘기들
    결국은 섹스가 문제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두번째는 아버지가 낯선 사람의 모습을 드러낸 걸 말씀하신걸까요?
    어릴 때 아빠는 원래 말이 많았데요. 말하는걸 좋아하고.
    그러다 결혼하고 말을 안하고 살다가
    요새 제가 질문을 하니까 봇물 터지듯 말을 좔좔하시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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